
고령중학교 졸업생이 후학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며 지역 교육발전에 큰 공을 세운 남계 이인 선생(1905∼69)의 흉상을 지난 10일 모교에 세웠다.
고령군 고령읍 내상리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4세 때 결혼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낮에는 붓 배달원, 밤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초등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 동경 입정대학과 동경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진학하는 등 다방면에서 학문을 갈고 닦았다.
그 후 1939년 민족학교 등으로 유명한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제탄압속에서도 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부친의 노환이 깊어져 1945년 대구로 전근해 경북동립중 교사와 경북여고 교감으로 근무했다.
이때 그에게 고향인 고령에서 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중학교가 없었던 고령지역에서는 독립지사 해영 신철휴 선생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이 중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교장이필요하지만, 고령 출신 교사들이 번번히 거절했다. 선생은 입신양명과 영달을 버리고 고향 후진양성을 위해 흔쾌히 승낙했다.
이로 인해 1947년 11월8일 고령중은 개교할 수 있었고, 그는 12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교 기반을 닦았다. 학교가 본 궤도에 오를 때까지 근무조건이 좋은 학교로의 전근도 마다하고 오직 학교 발전에 헌신했다. 고령중과 고령농고가 합쳐지면서 농고 교장으로 부임한 그는 학교를 명문고로 만들어놓고 타지로 전근했다.
타 지역에서 교장으로 있으면서도 고령의 유지들과 함께 고령여중 설립추진에 적극 협력, 설립 인가를 받고 여중 초대 교장으로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고령여중의 기반을 확고히 다진 후 김천 감문중으로 옮겼고, 이 학교에서 교육자로서의 일생을 마쳤다.
백운학 남계 이인 선생 흉상건립추진위원장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졸업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흉상을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