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개 교
1. 인가 및 개교
가. 개교의 배경
본교는 제1공화국 말기에 국가 사회의 교육적인 여망과 필요에 의해서 설립하게 되었으니, 해방 전에 설립된, 역사가 오랜 학교와는 다소 그 성격이 다른 학교라 하겠다. 그런데 초창기 신입생(1회 졸업생)이 3학년이 되던 해에는 4․19 혁명이 일어나 학원은 연일 데모와 맹휴(盟休)로 수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1회 졸업생이 졸업한 그해 5월 16일에 5․16 군사혁명으로 또 한 차례의 대변혁을 치렀으니, 말하자면 본교는 한국전쟁은 겪지 않았지만 국가 사회가 갖가지 진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격동기에 탄생한 셈이다.
나. 설립 인가
1958년 3월 12일, 문교부로부터 18학급 규모의 대구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당시 영남의 웅도인 대구에 공립 인문계고등학교로는 경북고등학교 하나뿐이어서 중학교 졸업생들의 고등학교 진학에 애로가 많다는 학부모들의 여론이 있었다. 이에, 당시 경북중학교와 구대구고보 동창회 측에서 경북중학교에 고등학교를 병설시킴으로써 중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에 도움을 주고, 또 그들 모교의 전통도 계승시킬 목적으로 대구고등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다방면으로 활동하여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병설추진이 좌절되고 개별교로 독립시켜 당시 인지초등학교 자리(대구시 원대동)에 개설토록 하였다.
2. 개교식
가. 개교식 거행
1958년 3월 12일 설립인가를 받은 후 3월 13일 창설 책임자로 임명받은 이보경(李寶卿)교감이 3월 18일부터 당시 경북중학교의 신축교사 6개 교실을 이용하여 신입생 입학사무, 개교식 등을 주관하고 교무를 운영하던 중, 1958년 4월 12일 당시 경북중학교 대운동장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구대구고보 당시의 제복(소매에 백삼선)과 제모(백삼선에 ‘高’자 모표)를 착용하고 입학식에 임하게 된 학생들은 3대 1의 입시 관문을 통과했다는 자부심으로 높은 이상과 희망에 부풀어 마냥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입학식(개교식)장에는 그 당시 경북중학교 직원과 학생, 대구고등학교 신입생 390명과 교직원, 경북도지사, 각 기관장, 이효상(李孝祥), 김종환(金鍾煥), 권동하(權東河), 임문석(林文碩), 이순희(李淳熙), 여상원(呂相源), 박만원(朴晩元) 등 많은 귀빈과 학부형이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학교장 직무대리 이보경 교감의 식사, 도지사의 고사, 대구고보 동창회 역원들의 간곡한 축사에 이어 경북중학교 학생과 대구고등학교 신입생 사이에 인사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경북중학교의 교가를 제창으로 입학식을 마치게 되었다.
그 해 9월 6일 당시 경북여고에 재직하던 정진기 교장이 본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보경 교감은 대구여중 교장으로 영전하고 후임으로 김관익(金寬益) 경북중 교감이 부임하여 완전한 체제가 갖추어져 비로소 교훈을 제정하고 확고한 교육이념과 목표를 설정하여 인문계고등학교로서의 성장 발전을 위하여 갖은 역경을 극복하며 경영자와 교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학생교육에 임하였다.
이듬해 4월 10일에 대명동 현재 교사로 이전하였고, 1960년 2월 28일 학생 데모가 있었으며, 사회적, 정치적 불안으로 학생들의 동요가 다소 있었으나, 교장의 풍부한 교육경험으로 난제들을 잘 해결하여 희생자를 내지 않고 안정된 상태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나. 수업 개시
1958년 4월 12일 개교식과 더불어 입학한 본교 학생들은 당시 경북중학교 신축교사 6개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교무실은 신축교사 옆 가교사 한 칸을 사용하였다.
입학한 학생들은 4월 14일부터 정상수업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수업은 이헌영(국어), 류시열(국어), 여진영(수학), 곽태전(역사), 이수철(지리), 김응수(영어), 신호식(화학), 이태준(상업), 이만갑(체육) 선생 등이 담당하였고, 미술과 음악은 당시 경북중학교 교사였던 소삼령, 지문현 선생이 담당하였다.
신입생(1학년)뿐인 본교는 초창기부터 좋은 교풍과 전통을 수립하기 위하여, 학생과 교사가 일치단결하였고,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전인적인 인간교육을 위해 학교수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대구고등학교 창설자의 일원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매시간의 수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다. 정진기(鄭鎭畿) 초대 교장 취임

1958년 3월 12일 설립인가를 받은 후 3월 13일에 창설 책임자로 임명받은 이보경(李寶卿) 교감이 신입생 입학사무, 개교식 등을 주관하고 경북중학교 신축교사 6개 교실을 이용하여 학교를 운영하던 중, 그 해 9월 6일 당시 경북여고에 재직하던 정진기 교장이 본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왼쪽사진)
이보경 교감은 10월 23일 대구여중 교장으로 영전하고 후임으로 김관익(金寬益) 경북중 교감이 11월 6일 부임하여 완전한 체제가 갖추어져 비로소 교훈을 정하고 확고한 교육이념과 목표를 설정하여 인문계고등학교로서의 성장 발전을 위하여 갖은 역경을 극복하며 경영자와 교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학생교육에 임하였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 10일에 대명동 현재의 교사로 이전하였고, 1960년 2.28에는 학생 데모가 있었으며, 사회적, 정치적 불안으로 학생들의 동요가 다소 있었으나, 교장의 풍부한 교육경험으로 난제들을 잘 해결하여 희생자를 내지 않고 안정된 상태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라. 교사 신축 내력 및 이전
1958년 3월 12일 대구고등학교가 18학급 설립 인가를 받은 후 학생들을 모집하고 4월 12일 개교식을 거행하여 인문계고등학교로 출범한 본교는 불행히도 독립된 학교건물을 가지지 못하고 경북중학교 교지 내의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전국에서도 명문임을 자랑하는 경북중학교의 전통과 역사를 그대로 계승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며 열심히 노력하였다.
이러던 중, 1년도 채 안되어 경북고등학교 측에서 경북중학교의 전통은 자기들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강한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경북고등학교 측에서 내건 조건은 이제까지 경북고등학교가 사용하던 단독건물인 현 교사를 대구고등학교에 넘겨 줄 터이니 경북중학교의 울타리에서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본교에서는 심사숙고하고 의논을 거듭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1959년 3월 25일 대구고등학교 교사의 위치 변경 인가에 따라, 경북고등학교가 1954년 6월 5일 신축 기공식을 하여 준공한 교사(1955년 1월부터 경북고에서 사용해온 대구시 남구 대명동 187번지)로 1959년 4월 10일 이전하여 현재까지 보금자리로 삼고 있다.
대구고등학교 교사의 내력과 교사 이전에 대한 이야기를 당시 경북고등학교의 이종림 교장과 대구고등학교 황종언 선생, 이헌영 교무과장 선생으로부터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설 대고 교사(校舍)의 내력
(前略) 1953년 1월, 본인(당시 경북고등학교 이종림 교장)이 대구상업고등학교로부터 경북고등학교로 전보되어 부임하여 보니, 당시 본교는 장관동(구 상서학교교사) 가교사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으나, 교정도 300평 정도에 불과할 뿐 아니라 불결하기 짝이 없어 1,500명이나 되는 학생이 도저히 용신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복귀할 본교사라도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도 못하여 어차피 신 교사를 마련하여야 할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경북고교는 도립인 만큼 경상북도에서 교사나 기타 시설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나, 한국전쟁 직후이며 재정 형편이 허락되지 않은 실정인지라, 갈자착정(渴者鑿井)으로 학교 자체가 대책을 강구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에 모든 시설을 구비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널찍한 기지라도 마련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주선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우선 저축되어 있는 예산으로 1954년 4월에 본관의 건축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사진행 중에 뜻밖에도 미8군으로부터 32개 교실분의 원조자재를 공여하겠다는 통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학년도 신입생 모집에 있어 파격적으로 보결생을 편입시키고 찬조금이라는 명목으로 고액을 징수하여 부족한 건축비에 충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결행한다면 반드시 감독관청으로부터의 문책은 물론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야기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였으나, 이 사업만 완결한다면 뒤에 여하한 문책도, 비난공격도 두려워할 바 없다고 굳게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1955년 입학시험에서 예정하였던 방법대로 단행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당지(當地)의 신문이 대서특필로 매일같이 공격하였고, 따라서 문교부에서 진상 조사차 내교하였으며, 심지어는 사법기관에서까지 움직일 기미가 엿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당국은 묵인 내지는 암암리에 지지하는 태도였습니다. 외부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이미 각오하고 있던 나로서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예정대로 추진하여 나갔습니다.
그 결과는 예상 이상으로 다액의 찬조금이 수납되어 건축비를 청산하고도 상당한 여액이 있어, 운동시설을 거의 완비하였을 뿐 아니라(이 운동시설은 경북고교가 이전하여 갈 때 거의 다 뜯어 갔고, 현존 시설은 후임 교장께서 신설하신 것) 교정 주위의 식수까지 하게 되었으니,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동안의 가혹하였던 고통도 잊은 듯 내심 쾌재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본관은 순전히 학부형의 부담으로 이룩된 것이요, 후관 자재는 미군의 원조로 건축비만 학교부담으로 된 것이며, 강당은 기지 정리작업 중에 본인이 서울로 전보되어 후임 교장께서 건설하신 것입니다. 이상이 귀교(대구고) 교사건설에 대한 개설(槪說)입니다.
끝으로 학생 제군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본 교사가 완공되어 준공식을 거행하려는 날 아침 모 신문 조간에 ‘경북고교의 교사가 훌륭한 전당이라는 찬사가 자자하나 실은 학부형의 고혈의 결정체’라고 꼬집는 비난의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식사(式辭)에 그 기사를 인용하여 ‘과연 본 교사는 학부형의 고혈의 결정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제군은 이것을 명심하여 교사는 물론 책상이나 기타 교구를 소중히 다루어 비생산적인 파손 등을 삼가라’고 훈유(訓諭)를 하였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 말은 그대로 대구고등학교 학생 제군에게도 부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後略)
교사(校舍) 이전
(前略) 경북고교 동창회에서는 경북고교가 경북중학교 전통을 잇도록 해야 된다고 하고, 또 학부형들도 동조하고 하여 겨우 돌도 못된 어린이를 면하지 못한 대구고교가 감히 이에 도전한다는 것은 너무나 벅찼다. 거기다가 교사 한 칸 없는 셋방살이 신세에서야…….
여기다가 ‘경북고교 교사를 대구고교에 양도하고 우리가 들어갈 터이니……’ 이렇게 나오는 데는 그 당시 교장선생님도 앞으로 학교 신축이 해결되고, 또 경북중학교 전통을 못 이을 바에야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교사 이전이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교장선생님도 대구고교가 경북중학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계요로(關係要路)와 절충했지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에 그렇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듬해(1959년) 신학기가 시작되고 4월 10일 양교 학생들은 자기가 사용하던 책걸상을 둘러메고 경북고교는 경북중학교 구내로, 대구고교는 현교사로 서로서로 이사(移舍)를 했다.
어떻게 보면 대구고교는 횡재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당초 생각했던 경북중학교의 전통을 못 잇는다는 점에서는 서운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2학년까지 14학급만 필요한데 10개 교실은 남아돌아가고 또 강당(미완성이었음)도 있어 학생활동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원장(垣墻)이 되지 않은 데다가(철조망이었음) 지세가 높고 우천이면 온 사방에 찰흙이라 통행에 많은 불편을 가져 왔다. 그리고 드센 기질을 가진 학생이 많아서 생활지도에 많은 애로를 느꼈다.
개교 3년의 회고
본교가 영남의 웅도 대구 땅에서 고고의 소리를 높이 울리고 탄생한 것은 바로 1958년 3월 12일이었다. 대고가 창설된 연유를 간단히 말하면 시내의 공립인문고교는 단지 1개교뿐이어서 고교 취학에 난관이 많다는 학부형들의 여론에 부응하여 경북중학교와 대구고보 동창회 측에서 모교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경북중학교에 고교병설을 목적으로 대고설립기성회를 구성하고 다방면으로 노력해서 설립된 학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병설추진이 좌절되고 개별 독립적인 학교로 대구시 원대동 전 인지국민학교자리에 18학급 인가가 내렸고 다음날 13일에 이보경 교감 외 10명의 교사와 서무 1명이 발령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됨에 따라 당국에서 15일부터 등청 집무하라는 지시는 다소 당황했으나 본교의 설립취지와 당면과제가 시급함을 이해하고 15일부터 학무과 장학관실 한 모퉁이에 대구고등학교 임시사무소란 간판을 처음으로 걸고 학생 모집요강작성(당시 후기고사) 및 원서 교부를 개시했고 발령된 전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당면과제를 토의한 날이 3월 17일 M회관이었다.
모두가 건설의 역군이 되겠다는 투지와 용기를 가졌으면서도 첫째 돈 없고, 둘째 살림살이 없는 나그네 모양 찾아가야 할 곳이 곧 경북중학교 가교사였다.
앞서 말한 원대동에 인가된 본교가 왜 이곳을 사용하게 되었던가 하면, 경북중학교에서 본교설립 추진당시에 신축교사 20개 교실을 대구고에 기부형식으로 되어 있었고 본도에서는 이를 채납된 것이어서 이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가 후 맨 첫 번째의 입학고사가 3월 25일 실시되어 응시자가 900명에 가까워 고사감독은 타교 직원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신생 대구고가 역사적인 개교식을 거행한 것은 4월 12일, 아아 이날은 대구고 역사상에 영원히 빛날 생일날이었다. 경북도지사의 고사와 대구고보 동창회 역원들의 간곡한 축사를 들어가며 샛별같이 반짝이던 눈동자와 두 손을 움켜쥐고 대구고의 건아가 되겠노라고 맹세한 것도 어제와 같구나!
이날 학부형총회가 개최되어 비로소 사친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김종환이 당선되었으며 앞서 3월 27일에 경북중․대구고등 동창회와 사회 유지를 총망라한 대구고건설기성회를 조직한 바 김종환, 권동하, 이효상, 임문석, 이순희, 여상원, 박만원 등 50명이 선임되었고 회장에 이순희(그해 10월 20일 사임, 권동하씨 당선), 부회장에 권동하, 이근하가 피선되어 회칙과 제반규약을 정하였다. 이 두 단체가 단합되어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왔으나 막상 양교가 분립되고 보니 다소 의견이 불합치하여 양교기성회 및 사친회 그리고 동창회 역원의 연석회의를 수차 개최하면서 결국 별개교로 운영하라는 본도의 지시마저 무시하면서 동일교로 추진하자는 결론을 얻어 본교기성회비 650만환을 경북중학교에 지불하고 신축 교사 20개 교실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과를 본 사회에서 동일계 학교라 인정될 무렵 경북고교에서는 병설을 방해까지 하였으나 전기 3단체 역원회에서는 대구고의 제복, 제모, 교기까지를 구대구고보 당시의 것을 정하고 3선에 高자를 정하고 개교일도 경북중 개교일인 5월 16일로 변경하는 동시에 교가도 경북중의 교가를 그대로 부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제반행사까지도 완전 동일교로 참가했음으로 사회에서는 양교가 완전 통합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개교 몇 달이 지난 9월 6일 초대 정진기 교장선생이 부임하고 이보경 교감은 대구여중 교장으로 영전하고 이어 김관익 교감(경북중 교감)이 부임하여 비로소 모든 기구가 갖추어지고 든든한 기틀이 잡혔던 것이다.
그 후 본교가 한 돌을 맞이할 무렵 3월 하순에 경북고는 학부형총회를 개최하여 대구고보의 전통을 계승할 학교는 경북고라고 주장하면서 경북중으로 이전결의를 채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경북중과 대구고보동창회 측은 경북중과 대구고를 동일교로 만들려는 당초의 계획을 번복하여 이를 수락하였으므로 우리도 이를 승낙하여 현교사로 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양교는 1959년 4월 10일 각각 입교식을 거행하고 양교가 이전 할 때 지금 3학년 제군들은 3선을 버리고 각자의 책상을 둘러메고 지금의 이 전당을 찾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웅장한 교사, 저 넓은 운동장, 그리고 미완성이나마 우뚝 솟은 강당을 가지고 앞에는 비슬산과 어깨를 겨누어보고 전망 좋고 아름다운 이곳이 우리의 모교가 된 것을 차라리 다행한 일이라고 환호성을 올렸던 그날도 기억에 새롭다.
이것은 본교 연혁의 주요기사가 아닐 수 없으며 전국적으로 일조일석에 이렇게 비약적인 발전의 유례를 볼 수 있는 학교가 없을 만큼 본교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 해 문교부로부터 종합고등학교로 선정되어 USOM 원조자금으로 50여 종에 달하는 실험․실습기구를 받게 되어 금후 우리의 활용여하에 따라 이론보다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연마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현 교사 이전 후 교가나 교기 등을 모두 개정하게 되어 본교의 3선이 백1선으로 경북고의 백1선이 3선으로 각각 바뀌게 되었다. 다시 교가를 제정하기 위해 1959년 7월에 교가 현상모집을 한 결과 응모 10여 편 가운데 한솔 이효상 선생의 작품이 선정되었고, 작곡 권위자 권태호 선생께 작곡을 의뢰하여 이해 8월 26일 강당에서 권 선생의 직접지도하에 비로소 우리 교가를 우렁차게 제창하였던 것이다.
다음해 1960년 2월 28일 800여 명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외친 2․28 대구고등 학생이 데모를 일으켰으니 이는 바로 거룩한 4월 민주혁명의 진원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제2공화국 창립의 선봉으로 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에 10월 1일부터 제2공화국 탄생을 기념하는 뜻에서 개교당시의 모표 ‘高’자를 버리고 오늘의 이 모표로 개정하였다. 이는 시내에 가짜 학생이 많아 본교의 피해가 허다하여 이를 방지하는 뜻도 있었다.
본교가 세 돌도 채 안되었으나 대외적으로 학예, 체육 등 다방면으로 타교와 동등한 수준에 올라 벌써 전통 있는 학교와 대전하여 비견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우리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우나 대외적으로 문예작품의 특선 및 입선, 과학전시회(서울)에 수종이 입선, 미술작품이 수종 특선하였으며, 체육부 특히 등산반에서 3년 연속 우승하여 그 전통이 이미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럭비, 송구, 야구 등도 전통을 자랑하는 타교의 수준에 달하였으니, 학생 제군들은 금후 더욱 분발 매진하여 개체의 완전한 발전을 완수하고 나아가서는 모교발전에 가일층 노력하여 일취월장 대구고의 명성을 내외에 선양하도록 힘써 나아가자.
끝으로 박영우 교감 선생을 새로 맞은 지 어언 10개월이 지난 후 모든 체제는 갖추어졌다. 앞으로 전교생은 물론 특히 3학년 제군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몇 달 후면 정든 모교를 떠나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졸업생으로 대구고 역사의 페이지에 남을 이름들임을 깨달아 그동안 빛나는 전통수립에 더욱 힘써 후배의 모범이 되고 사회진출 후에도 모교발전에 많은 활약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 대고생은 목하 찬연한 창조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놓았으니 시대의 총아들이 되었다. 모쪼록 우리는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더 큰일을 위해 노력할 기반을 닦을 것을 부탁하며 회고기를 마친다.(개교 당시 이헌영 교무과장 자료 제공)
마. 대구고등학교와 경북고등학교 교명 규명
1950. 5. 30. (현 경북고)대구고등학교 신설(경북중학과 분리)
6. 24. 대구고등학교 개교식 거행
6. 25. 경북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51. 4. 1. 대구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53. 9. 4. 경북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54. 6. 5. 대명동 신축 교사 기공식 거행
1958. 3. 12. (현 대구고)대구고등학교 설립인가(18학급)
3. 13. 대구고등학교 교장직무대리 이보경 교감 취임
4. 12. 대구고등학교 경북중학교에서 개교 기념식 거행
1959. 경북고등학교에서 구 경북중학교 전통 계승 여론 조성
3. 10. 대구고등학교 24학급 인가
3. 25. 대구시 대명동 187번지(구 경북고등학교)로 교사 위치 변경 인가
4. 10. 경북고가 경북중학 교사로 입교. 합교식 거행
(교환 이사할 때, 교기, 교모, 교복의 3선은 경북고로 주고, 경북고가 사용하던 백선 8mm 폭의 외선을 교기와 교모에 대구고가 사용하기로 함.)
< 大邱高 50 年史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