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고 OB 산악부
2008년 1월 11일 조선일보사 발간 월간잡지 ‘山’에서 고교 동문산악회 탐방시리즈 열 번째로 대구고산악부를 찾았다. 대구고 동창회관에서 김종욱(1회), 손익성(7회), 문경득(16회), 정광현(18회), 이인석(20회), 박재욱(23회) 등 동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구고 OB산악부가 창립된 후 현재까지의 산악부 활동을 직접 활동한 동문들이 산 증인으로 활동상을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을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조선일보 월간 ‘山’ 통권460호, 2008.2.1. 발행)
<고교 동문산악회 탐방>
고교 동문산악회 탐방 시리즈 열 번째로 대구고를 찾았다. 전국 대부분 지역의 고교 산악부 현황을 대도시 중심으로 역사와 활동상황을 1차로 살펴본 데 이어 2차로 고교 산악활동이 활발한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학교를 선별해서 순방하고 있다.
지난 호에선 55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의 경기고 OB 산악부인 라테르네를 소개했고, 이번 호에선 서울 못지않은 산악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지역인 대구에서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으며, 창립 이후 50년간 역사를 끊임없이 유지하고 있는 대구고 산악부를 찾아갔다.
대구고 산악부는 많은 부분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공립고교로서는 전국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산악부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학교다. 모든 학교가 입시와 내신 영향으로 산악부를 일찌감치 없앤 점을 감안하여 산악부 특유의 뚝심이 절로 느껴진다. 물론 선배들의 재정적 물리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로 학교 개교와 산악부 역사가 운명을 같이 하고 있는 점이다. 학교 개교한 해에 산악부도 창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학교에서도 가장 오래된 특활부다. 세 번째로 60km 극복 등행대회가 1959년 생긴 이래 한번도 빠지지 않고 출전했다. 정확한 통계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일반 남녀팀 통틀어 첫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대구 지역에서 다른 학교 못지않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주도적으로 산악활동을 펼친 학교이다.
대구고는 1958년 4월 개교했다. 개교한 그 해에 이미 경북학생산악연맹에 가입해서 중학교 때부터 산악활동을 했던 김종욱이 체육담당 이만갑 지도교사를 모시고 산악부를 창단했다.
임문현, 신석웅, 전찬호, 이달수, 김용길 등이 주축 멤버였다. 특히 이만갑 선생은 기계체조, 육상, 핸드볼 등에 능숙한 만능 스포츠맨 임문현을 꼭 산악부로 영입하라고 리더 김종욱에게 지시했다. 임문현은 기계체조로 단련된 유연한 신체 덕분에 암벽등반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고교 시절 그에 얽힌 일화 한 토막. 당시는 등산장비가 절대 귀한 시절이었다. 다른 팀 클라이머들이 어렵게 구해 암벽에 박아놓은 하켄을 올라가면서 하나씩 수거해버렸다. 그러나 올라갈 때는 하켄에 밧줄을 의존해 지장이 없었으나, 내려올 때는 밧줄에만 의지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김종욱과 임문현은 대구고 산악부 정신적 지주로서 많은 역할을 했다.
1학년들끼리 모여 훈련과 학술조사 등반을 하다 1959년 해가 바뀌어 신입생을 받았다. 이 때 신입생이 한국 등반사에 큰 획을 그은 박상열과 김선휘 등이다.
박상열도 마찬가지로 중학교 때부터 이미 등산에 빠져 있었다. 고교 입학 후 산악부에 제발로 찾아온 박상열은 ‘팔공산 곰’ 이라는 그의 별명에 걸맞게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등반실력을 발휘했다. 대구 원로 산악인 변완철, 배석교 선생은 그를 훈련시키면서 두 손으로 바위를 잡고 두 다리를 공중에 띄운 채 30여 분 버텨 기어이 스텝 자리를 찾아내는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 변완철 선생은 “상열이는 대구뿐 아니라 전국의 타이거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60km 등행대회 제1회부터 5연속 우승
그 기대대로 박상열은 1971년 한국 최초 히말리야 8,000m급 로체샤르(8,383m) 원정, 1977년 에베레스트(8,848m) 등반 부대장, 1983년 카라코람K2(8,602m) 정찰대장, 1989년 대구 초오유(8,201m) 원정대장, 1992년 대구산악연맹 아콩카구아(6,985m) 원정대장, 1999년 대산련 캉첸중가(8,586m) 원정 부단장 등 한국 해외등반 1세대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959년 1․2학년이 주축이 돼 활동하던 그 즈음 학생의 날 기념 전국 60km 극복 등행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전국 단위의 첫 등산대회였다.
그 전까지 학술조사라는 명목으로 등반대회가 있었으나 규모면에서 등행대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대구고 산악부는 김종욱 리더를 필두로 임문현, 1학년 리더 박상열 등이 앞장서 첫 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이어 3회 리더 박태언, 4회 리더 도대경, 5회 리더 김종대까지 5연속 우승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5연속 우승은 대회초기를 감안하더라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 유일한 기록이다. 이들이 발군의 등반실력을 발휘한 원동력은 초기부터 체계적인 등산교육을 받은 영향이 컸다.
대구 원로 산악인들은 하계산간(등산) 학교와 등행대회를 열어 이들에게 이론과 실전을 겸비할 수 있는 환경을 어렸을 때부터 접할 수 있게 했다.
산악부는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했다. 회원들도 매년 모여들었다. 다른 학교의 견제가 본격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의 등반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대구 원로들이 만든 환경 덕분이었다.
5연속 우승 이후 한동안 우승은 못했지만 준우승, 분투상 등 성적을 꾸준히 쌓아나갔다.
대구고 산악부는 1970년대 들어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았다. 2회 박상열 대원이 1977 에베레스트 부대장으로 참가해 한국 등반사상 첫 에베레스트 등정을 노렸지만 엄청난 폭설 탓에 눈물을 머금고 정상 40여m 앞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산시 악천후 속 해발 8,700m 지점에서 무산소로 비박한 뒤 살아서 다음날 C5로 내려온 일화는 당시로선 세계 등반계가 놀란 사건이었다. 비록 등정에 실패했지만 박상열은 한국 등반사에 새로운 장을 연 일원으로서 한국 국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OB들은 대구고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전까지 학생산악연맹에 자동으로 가입해서 활동해왔지만 대구고란 이름을 대외로 각인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내 대구고 산악부 출범 20년 만에 OB 산악부를 발족시켰다. 초대회장에 조영길(1회), 총무에 3회 리더 박태언을 선임했다. 선배들의 활약에 자극받은 재학생들은 1977년 그 해 다시 60km 극복 등행대회를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 해서 대통령기 등 전국 대회에서 우수의 성적을 거뒀다. 이 때 멤버들이 리더 장덕수, 정경호, 유병구, 김진구, 이종민 등이었다. OB 산악부 발족과 재학생들의 분투로 대구고 산악부는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동창회서 산악부 출신이 막강 파워
OB 산악부 발족 이후 재정자립과 회원확보에 주력, 산악부 전성기를 구가할 터전을 닦아나갔다. 그 첫 작업이 195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매월 월례 산행하던 산행을 매년 한 차례 이상 해외 명산 순례 일환으로 외국 원정을 가기로 결의했다.
1992년 백두산 원정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후 거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다녀왔다. 1993년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1994년 일본 북알프스, 1995년 대만옥산, 1996년 중국 황산, 1997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1999년 안나푸르나 트레킹, 2000년 히말라야 히운출리 정찰, 2002년 히운출리 원정, 2004년 중국 옥룡설산에 이어 2007년엔 일본 구중산을 다녀왔다. 특히 2000년 히운출리 정찰은 1회부터 40회까지 26명이 참가, 선후배간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모든 원정이 대구고 OB 이름으로 단독 주최한 것이고, 다른 원정대에 대원으로 참가한 기록은 부지기수로 많다. 이들이 해외원정 다녀온 기록으로만 보면 단일 고교 산악부로서 전국 최고수준이라고 자랑했다.
1994년엔 재학생들을 위해 OB들이 교내 인공암장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전국 대회를 1995년과 1997년 두 차례나 개최하기도 했지만 아쉽게 학교에서 유지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3년 전 폐쇄했다.
1994년엔 OB 산악부 이름으로 기금 1억 2천여만 원을 들여 팔공산에 대단위 산장 겸 산악회관을 마련해 동문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장기적으로 대구 산악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모아 회관을 산악박물관으로까지 발전시킬 계획이다. OB들은 산악행사만 있으면 모두 발 벗고 나선다. 등반대회가 열리면 경비를 선배들이 부담한다. 선배들이 직접 나서 훈련과 기술을 전수한다. 학교에선 산악부 예산도 배정 안한다. 학교에서 할 일이 없을 정도니 산악부를 없앨 이유가 없다. 공립고 특성상 한 교사가 특정학교에 오래 머물수 없는 점을 감안하면 공립고에서 산악부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재학생 산악반에 지금 1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OB 회원들은 150여 명에 달한다. 동창회 단일조직으로 최대 규모다. 총동창회에서도 산악부가 막강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야구부 등 다른 조직이 있긴 하지만 산악부만큼 역사와 전통과 뚝심을 따라오지 못한다. 김영진 현 동창회장도 산악부 9기로, 전임 OB 산악부 회장을 지냈다. 역대 동창회장 중에 산악부 출신이 많다. 그만큼 맹위를 떨친다. 총동창회 차원의 산행에서는 산행대장으로 전체 조직을 이끈다. 이들은 이와 별도로 매월 한 차례 이상 정기 산행을 가지며 재경 산악부와 재미 산악부와 함께 매년 한 차례 이상 모임을 갖는다. 문경득 OB 회장은 “산악부 창립 50주년을 맞아 산악회관에 이어 산 초입에 막영시설을 마련할 계획” 이라며 “이 시설이 완공되면 대구고 산악부가 다시 한번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재학생들의 열기도 재가열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목표를 밝혔다.(글 박정우 차장대우 jungwo@chosun.com 사진 대구고 OB산악부 제공)
한자리 “산은 사회생활 축소판... 등산은 극기의 한 과정”
운명과도 같아 ... 삶의 질서, 인생의 굴곡 배워
대구고 산악부 OB회원들을 지난 1월 11일 대구고 동창회관에서 만났다. 1회부터 23회까지 참석했지만 주로 선배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2시간 남짓 대화 중에서 후배 5명의 얘기는 30분도 채 안됐지만 선배 2명의 활동상이 대부분 이어졌다. 자리를 옮겼다. 몇 사람이 더 왔다. 분위기는 비슷했다. 주로 선배가 얘기했고 후배는 들었다. 물론 나중에 우스개 소리 비슷한 농담이 나왔다. “똑같은 얘기를 수십 번 이상 들으면 아무리 좋은 얘기도 지겨울 수밖에 없다.”고, 후배라고 하지만 전부 40대와 50대였다. 그 나이에 아직 선배를 깍듯이 모시는 모임은 산악부 외에는 없을 성 싶었다. 위계와 의리, 이들이 가진 영원한 화두였다.
이들에게도 수십 년 동안 다닌 ‘그놈의 산이 뭔지’ 물어봤다.
“산은 사회생활의 축소판이다. 교육계에서 평생을 바쳤지만 산악운동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 등산은 정신력을 강하게 하고, 일을 체계적으로 계획적으로 실천하게 하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며, 책임감을 가르치고, 나아가 창의성까지 가지게 한다. 산을 다니다 보면 사회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걸 먼저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게 바로 산의 힘이다.”-김종욱(1회. 이학박사)
“산은 내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처음 야구선수하다 60km 등행대회를 보고 바로 산악부를 찾았다. 이후 나를 끄는 그 어떤 힘에 이끌려 지금까지 왔다. 대학교에서, 연맹회장하면서도, 교장하면서도 한시도 산을 놓은 적이 없다.”-손익성(7회. 영진고 교장)
“산은 나를 극기하는 한 과정이었다. 온실 속에서 커 가던 나에게 산을 통해 만난 선배들은 나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난 훈련을 시켰다. 당시는 괴롭고 힘들었지만 성인이 되고나서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게 자부심으로 다가왔다. 50이 넘은 지금도 선배한테 혼나고 있다. 이런 선후배 관계가 자랑스럽게 여겨진다.”-문경득(16회. 제이시건설 부사장)
“산을 통해서 삶의 질서를 배웠다. 산을 오를 땐 어려울 때도 있고, 쉬울 때도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산을 통해 미리 경험하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진다. 그게 인생이고, 산을 여태 떠나지 못한 이유다.”-정광현(18회. 규림D&C 대표)
“바위 타다 떨어졌을 때나, 눈 속에 빠지거나 갇혔을 때 ‘다시는 산에 오지 않겠다’라고 다짐한 게 벌써 수십 번이 넘었다 지금 그 인생을 부정하면 내 인생이 통째로 날아가는 것 같다. 산은 어느 덧 운명과도 같이 내게 다가와 있었다.”-박재욱(23회. 대하스틸 대표)
산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고, 동시에 얻었지만 어느 순간 운명같이 다가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버린 산이 그들에게 수십 년 동안 다닌 ‘그 놈의 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