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부 활동...해체...그리고 부활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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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03-1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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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는 연륜이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되지 않으므로 체육의 역사도 아직 어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고라면 스포츠를 연상할 만큼 경북 체육계의 패권을 장악하여 왔다고 자부하여도 지나치다고 책할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고 믿는다.

 

 경북도민들도 ‘체육은 대고다’라고 인식하게 되어, 드디어는 1962년 제43회 전국체육대회를 장식하는 매스게임을 본교 전학생들이 맡아서, ‘재건의 물결’이란 주제 하에 전국 체전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미의 체전을 베풀어 약동하는 젊은이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각 신문과 방송기관 및 전국 체육인들의 우레와 같은 찬사를 받게 되었다.

 

체육부에는 개교와 동시에 육상, 야구, 축구, 럭비축구, 농구, 배구, 핸드볼, 탁구, 펜싱, 산악, 빙상, 수영, 배드민턴반 등을 두어 거교적으로 육성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으나, 현재는 학교의 제반 형편으로 지난날에 비해서 다소 손색이 있음을 생각할 때, 실로 유감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번 10주년을 맞이하여 시설을 확장하고 소수의 특기생이나마 모집하여 재출발할 계획이므로 본교 체육의 전도가 자못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체육부의 활약상을 한 종목씩  살펴보기로 한다

 

. 야구반

 

1960. 9. 5. 제1회 시내 고등학교 대항 리그전 감투상

10. 22. 제7회 경북지구 학생야구대회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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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야구부 (1960년)


1961. 9. 16. 제42회 전국체육대회 예선대회 우승

11. 3. 제8회 경북지구야구대회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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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도


1962. 4. 23. 제2회 전국4도시대항 선발전 우승

4. 29. 제43회 전국체육대회 예선대회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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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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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전 입장식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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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교포와 야구시합     1962년


1963. 9. 10. 제10회 경북체육대회 겸 제44회 전국 체육대회 선발대회 우승

11. 16. 제9회 경북지구 학생야구대회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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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도


1964. 5. 17. 제3회 전국4도시 대항 선발전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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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부 재창단  1976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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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부 재창단 기승제 1976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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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꾸기행사-야구장 조성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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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부 재창단  1977년


야구부 중흥

 

가. 부활 경위

 

본교 야구부는 1960년 5월 정진기 교장 재직시 정인식 선생이 12명의 선수로 창단을 하였다.

이들은 맹훈련을 하여 동년 10월 22일, 제7회 경북지구학생야구대회에서 준우승하였다. 이듬해 4월 6일 제2대 엄한준 교장이 부임하여 집중적으로 야구부를 지원 육성하자, 이에 힘을 입어 야구부장과 감독, 그리고 부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더욱 훈련에 박차를 가하여 1961년 9월 16일 제42회 전국체육대회 예선전에서 우승하였고, 동년 11월 3일 제8회 경북지구학생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였으며, 1962년 4월 23일 경북야구연맹과 매일신문사가 공동주최한 제2회 전국4도시고등학교 선발대회 대구지구대표예선대회에서 우승하였고, 동년 4월 29일 제43회 전국체육대회 경북 제1차선수선발대회에서 준우승하는 등 활동과 그 실적이 훌륭했다.

제3대 김태식 교장 재직 중에도 야구부는 존속해오다가, 제4대 최근배 교장이 1964년 4월 2일 부임한 후 동년 8월에 야구부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졸업생수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서 졸업생의 나이도 많아지고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지자 졸업생들이 야구부를 부활할 것을 요청해 왔고 재학생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리고 전국적인 추세로 보아도 재학생이 2,000명이 넘는 학교는 모두 단체경기인 축구팀이나 야구팀을 육성하여 재학생과 졸업생 사이의 구심점을 만들고 졸업생과 학교와의 유대를 공고히 하던 때라, 본교는 이런 교내외의 추세와 요청에 부응하여 야구부 해체 13년만에 당시 제9대 권오갑 교장이 동창회와 유관기관과의 협조하에 야구부 부활을 공식으로 선언하고 영남일보에 이를 보도하였다.

 

이에 따라, 동창회는 1976년 9월 14일 야구부결성 준비작업으로 야구부후원회 조직을 위한 임시동창회를 개최하여 회장 허승, 부회장 양실, 박병만, 한재동, 그리고 간사 8명을 선출했다. 이어 10월 1일, 서울 동창회도 야구부후원을 위해 종묘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으로 주식회사 부신 대표이사 이성희를 선출하였고, 부산에서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10월 20일 총회를 개최하여 한국합판 대표 안선출을 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안동에서는 인산약국장 박준길, 포항에서는 최대영이 회장직을 각각 맡아 후원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 야구부 조직

 

이리하여, 1976년 10월 30일, 당시 대건중 출신 6명, 대구중 출신 10명을 선수로 선발하고, 감독으로 본교 제4회 졸업생인 이창웅이 취임하게 되었다. 이들로 조직된 본교 야구부는 동년 11월 12일 경북야구협회 주최 1977년도 전망전에 출전하여 이튿날 대구상고와 친선경기를 가졌고, 동년 11월 19일 오후 2시에 본교 대운동장에서 야구부 결단식을 거행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간추려 야구부 창단, 해체, 그리고 부활(재창단)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0. 5. 1. 정진기 교장 재직시 정인식(당시 선산군교육장)선생께서 12명의 선수로 창단

10.22. 제7회 경북지구 초중고야구대회 준우승

1961. 3.31. 엄한준 교장 야구부 육성․상고, 경고, 공고, 본교 4개팀 자웅을 겨룸

9.16. 제42회 전국체육대회 예선대회 우승

11. 3. 대구상업고등학교 주최 초․중․고야구대회 준우승

1962. 4.23. 경북야구연맹과 매일신문 공동주최 제2회 전국4도시 고등학교선발야구대회

대구지구 대표 예선대회 우승

4.29. 제43회 전국체육대회 경북 제1차 선수선발대회 준우승

1964. 8.31. 최근배 교장 재직 중 야구부 해체

 

1976. 3. 1. 권오갑 교장 부임․야구부 부활

9. 4. 대구매일, 영남일보에 본교 야구부 부활 보도

9.14. 동창회이사회에서 야구부후원회 결성

9.15. 야구부후원회 임원 결성(회장 허승, 부회장 양실, 박병만, 한재동, 간사 8명)

10. 1. 재경동창회 야구부후원회 결성(회장 이성희)

10.20. 재부산동창회 야구부후원회 결성(회장 안선출)

10.30. 감독 이창웅을 비롯 16명(대건중 6명, 대구중 10명) 맹훈련

11.12. 경북야구협회주최 1977년도 전망전 출전

11.19. 오후 2시 본교 대운동장에서 야구부 결단식 거행

1977. 6.24. 경북교육감기 쟁탈전 준우승

1977.11. 6. 1978년도 고교 전망전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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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선수 명단 (16명)

투 수 : 박재현(대건중), 전용권(대건중), 배성실(대건중)

포 수 : 조정구(대구중), 이정희(대건중)

내야수 : 김종석(대건중), 김광익(대구중), 은석진(대구중), 심규영(대구중),이경우(대구중), 이주식(대구중)

외야수 : 도이석(대구중), 전승희(대구중), 김오웅(대구중)

유격수 : 김영국(대건중), 서상규(대구중)

 

다. [좌담회]정상을 향한 웅지의 부활

 

◦ 일 시 : 1977년 3월 10일

◦ 장 소 : 대구고등학교 교장실

◦ 참석자 : 권오갑 교장선생권재식 서무과장구수갑 선생(대구중 야구부장)이창웅 감독(대구고 4회)이준명 선생(체육주임)안인욱 선생(1회 졸업생)

 

※ 야구선수

박재현(투수) 서상규(2루수) 도이석(중견수)

김오웅(좌익수) 김영국(유격수)

 

※ 사회 : 서상수, 기록 : 채홍삼, 편집 : 박상봉, 노기준

 

<재창단 경위>

 

사회 :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선생님을 이 자리에 모신 것은 우리 학교 야구부 재창단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어 보고 앞으로의 야구부의 무궁한 발전을 빌고자 하여서입니다. 그럼, 먼저 야구부 재창단에 가장 힘을 많이 쓰신 교장선생님께 재창단의 동기를 여쭈어 보겠습니다.

교장 : 대형화한 학교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운동부인데, 그 중에서 일반의 관심이 많은 야구를 교기로 한다면 재학생․교직원․동창생들을 연결할 수 있는 구심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회 : 서무과장께서 교장선생님을 도와 많은 수고를 하셨는데 먼저 예산 조달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서무과장 : 어느 팀이든지 예산조달이 가장 어려운 문제점인데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동창회의 열의 있는 성원과 학교예산으로 우선 운영해 나갈 수가 있으리라 봅니다.

사회 : 교장선생께서 이번 일을 추진해 나가시는 동안 특히 어려운 점이라도 있었다면?

교장 : 역시 예산 조달문제였지만 너무 야구부에 치중하게 되면 다른 일반부서의 활동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되도록이면 그런 것을 보완해 나가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사회 : 감독선생은 맨 먼저 야구부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직접 감독을 부탁 받았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감독 : 먼저 야구인으로서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으로 잘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더군요.

사회 : 구선생은 우리 대고야구부의 부활이 대구야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하십니까?

구부장 : 저는 만약 대구에서 고교야구부가 생긴다면 틀림없이 이 학교에서 생길 것이라고 예상해 왔습니다. 그리고 3년 내에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회 : 안 선생은 선배로서 야구부 부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선생님 : 본교의 야구부가 13년만에 다시 부활되어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서울이나 부산의 동창들도 이젠 ‘대구고등’을 큰 소리로 외치며 다닐 수 있다고 기뻐하더군요.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후원해 볼 작정입니다.

사회 : 그 동안 수고가 많으셨던 교장선생, 선배들 그리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려야겠습니다.

<13년 전의 야구부> (중략)

<출발, 그 결단식>

사회 : 먼저 교장선생께서는 결단식 때 무척 흐뭇해 하셨는데 그때 얘기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교장 : 사람에게 욕심은 한이 없는 것이지요. 고생을 많이 해서 괜히 후회까지 들었는데 다행히 우수한 선수가 많이 나와 무척 기뻤습니다. (웃으시며) 앞으로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밀고 나갈 작정입니다.

사회 : (선수들을 돌아보며) 참 그때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는데 그때의 감회가 어떠했는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얘기해 주실까요?

박재현 : 투수로서 좀 더 훌륭한 선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을 지켜보시는 모든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서상규 : 지금 우리들로서는 꾸준히 노력한다면 전국 4강 대열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전체가 합심하여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도이석 : 곧 실시될 동계훈련을 계기로 하여 감독선생님의 지도를 받들어 어느 팀에도 못지않은 팀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김오웅 : 열심히 하겠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김영국 : 아직까지 팀워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걱정입니다. 더욱 열심히 해서 그것을 극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사회 : 결의에 찬 이야기를 들으니까 마음 든든합니다.

<첫 시합(평가전)> (중략)

<정상의 뜻을 품고>

사회 : 이번엔 감독선생께서 선수들 자랑을 좀, 아니 많이 해 주십시오.

감독 : 투수력이 약하지만 앞으로 보완하면 좋은 실력을 가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특히 유격수와 2루수의 콤비가 자랑할 만합니다. 선수들 개개인의 특징 같은 것을 일일이 밝힐 순 없겠지만, 투수의 강속구와 커브는 주무기로서 손색이 없을 겁니다.

사회 : 그럼, 이번엔 선수들이 감독 자랑을 해 주시겠습니까?

김영국 : 이론적으로 많이 아시고, 우리 선수들 각각의 개성을 잘 파악하시고, 또 어려운 점을 잘 해결해 주십니다.

김오웅 : 선생님은 키가 작지만…….(일동 폭소)

감독 :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걸.(폭소)

사회 : 구 선생님은 곧 우리 학교 야구부의 팀 부장선생으로 오실 것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앞으로 팀을 어떻게 지도해 가려고 하시는지요.

구부장 : 제일 문제점이 되는 것이 재정문제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재정문제를 잘 해결하여 다시는 해체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회 : 그럼, 교장선생께서 앞으로의 팀 육성방안은 어떤 것인지요?

교장 : 한마디로 말해서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육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감독과 부장선생님과 많은 얘기를 하여 잘 해 나가겠습니다.

사회 : 그럼, 마지막으로 선수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얘기해 주십시오.

교장 : 난 선수들에게 공부하는 선수가 되어 달라고 얘기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명랑한 언어를 사용하는 선수가 되어 주길 부탁하겠습니다.

서무과장 : 한마디로 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져라. 마치는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라는 말을 하겠습니다.

이선생님 : 선수들은 운동장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선수가 되어 달라는 겁니다. 늘 연습을 하면서 생활해 달라는 것입니다.

안선생님 : 난 감독선생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출범한 야구부인 만큼 목적지인 전국 정상에 도달해 주시길 바라고 싶습니다.

감독 : 저는 우리 야구부를 지켜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더욱더 열렬한 성원과 후원을 바랍니다.

사회 : 감사합니다.

 

라. 야구 시설

 

13년만에 야구부가 부활되었으나 시설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차적으로 야구장 정비를 하였는데, 그때 교장이 직접 측량하고 진두지휘하여 학교 체육담당교사와 기능직들, 그리고 야구부 부활 소식을 듣고 기쁨에 부풀어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이 합심하여, 20㎡의 땅을 깊이 60㎝ 정도로 파서 흙을 체로 치고 흙과 모래를 섞어서 야구장을 정비하였다.(1976. 10. 7.~10. 20.)

배수가 잘 되도록 연탄재를 수집할 때, 학교 근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연탄재를 리어카에 실어 날라 정지작업을 빠른 시일 내에 완료하도록 협조하였다. 이러한 재학생의 마음은 야구부 부활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백네트도 40여만 원의 제작비를 들여 1976년 10월 26일 완성하였다.

어느 정도 시설을 갖추고 훈련을 강행하려고 했으나, 합숙소도 없고 몸을 씻을 목욕 시설도 없어서 훈련에 많은 애로가 있었다. 그리하여, 임시 조치로 체육장 앞에 샤워장을 설치해서 몸을 씻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면 훈련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1977년 10월 17일에 대운동장 남편, 정구장 서편에 공사금 280여만 원으로 합숙소 신축공사를 착공하여 동년 11월 28일에 건평 20평의 합숙소를 준공하였다. 내부에는 합숙실, 조리실, 샤워장, 식당, 지도교사실을 마련했다.

1977년 12월 5일 합숙소 준공식을 올리고, 야구부의 발전과 성장을 기원했다. 합숙소 명칭은 현상 모집한 결과 30여 가지가 모였는데, ‘필승료’를 택하여 서예가 효정(권현택) 선생이 현판을 써서 준공식 때 달았다.

 

마. 재창단 이후 경기 및 전적

 

◦ 1977. 3. 대통령배 참가 2차 대구 예선대회 대구고 : 경북고 4 : 0 승

◦ 1977. 4. 부산 전국4도시 대회 대구고 : 서울고 2 : 5 패

◦ 1977. 4. 대구 4도시 대회 대구고 : 선린상고 3 : 5 패

◦ 1977. 4. 황금사자기 대구 예선 대구고 : 대구상고 4 : 4 무승부

◦ 1977. 5. 7. 부산 국제신보 친선대회 대구고 : 경남고 2 : 6 패

◦ 1977. 6.10. 도민체전 시범 경기 대구고 : 대구상고 0 : 0 무승부

◦ 1977. 6.24. 경북교육감기 쟁탈전(준우승) 대구고 : 경북고 2 : 1 승

대구고 : 대구상고 3 : 5 패

◦ 1977. 7.14. 제3회 황금사자기 대회 대구고 : 신일고 1 : 4 패

◦ 1977. 8.10. 제7회 봉황대기 전국대회 대구고 : 보성고 2 : 5 패

◦ 1977.11. 6. 1978년도 고교전망전(우승) 대구고 : 대구상고 4 : 2 승

대구고 : 경북고 3 : 2 승

◦ 1978. 3.11. 부산 전지훈련 친선대회 대구고 : 부산고 0 : 3 패

◦ 1978. 3.17. 시즌 오픈 1차 리그전 대구고 : 대구상고 2 : 3 패

(후략)

※ 1978년 당시 선수 명단

(2학년)

김오웅 박재현 이주식 전용권 심규영 전승희 은석진 이경우 김영국 도이석 조정구

(1학년)

이용희 조삼희 신보성 임창호 김인동 최민영 정병홍 이무형 김호남 이하동

 

 

1977년 11월 6일 드디어 재창단 이후 첫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78 전망전 야구고등부 ‘대구고는 6일 대구시운 야구장서 폐막된 1978년도 야구전망전에서 경북고마저 3:2로 물리치고[대구상고 전에서 4:2로 승] 창단 후 첫 정상을 차지했다. …(중략)… 이날 한 게임에서 더블플레이가 5개나 쏟아졌다.’ 이 신문의 표제어가 ‘강호 慶高 격파’로 대문짝만한 글자로 썼는데, 말 그대로 당시 경북고는 전국 무대를 휩쓸던 강호 중의 강호가 아니었던가. 이날의 경고의 투수도 당시 2학년이었던 진동한 선수였다.

동아일보사 주최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도 1978년 제32회 대회와 1979년 제33회 대회에 경북대표로 출전하였다. 봉황대기의 역대기록을 참고로 살펴보면, 1979년 제9회 봉황대기에서 우리 대구고는 4위에 입상하였다. 우승 광주상고, 준우승 인천고, 3위 천안북일고에 이어 4강에 머물렀다. 그러나 1977년 11월에 재창단한 우리로서는 불과 1․2년만에 전국대회에서 그 명함을 내밀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며, 이후 1980년대 중반의 화려한 날개짓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야구를 매개로 한 남다른 애교심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치고, 뛰고, 달리는 야구의 호쾌함이 박력을 외치는 우리의 기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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