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콘크리트와 자동차 천지여서 숨이 턱턱 막힌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남산 아래에 위치한 우리은행 본점 건물에 설치된 대형 글판은 광화문네거리의 교보문고 건물의 글판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우리 글판’이다. 그 글판에는 ‘참새 한 마리/햇살 부스러기 콕콕 쪼아대는/하, 눈부신 날’이란 허형만 목포대 교수의 시어(詩語)가 담겨 있었다.
그 눈부신 봄날 오후, 이순우(61) 우리은행장을 만났다. 지난달 취임한 이 행장이 매일신문을 통해 처음으로 고향(경주)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자리인 셈이다. 상업은행을 통해 은행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가 은행장에 취임한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았다.
대구고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 진학을 위해 상경, 40여년 이상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그의 말투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듬뿍 담겨있었다. 이 행장은 열심히 살았다. 특히 수석부행장이 된 뒤에는 그 자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열정을 고객과 직원들에게 쏟아부었다.“깡촌에서 나고 자라 거대 은행의 부행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면 됐지 않나요. 폭탄주를 매일 30~40잔씩 마시다시피 했어요. 집에 있나 병원에 있나 누워 있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이었죠.”
그를 한 번 만난 사람들은 '겸손하지만 재미있고 잘 노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이재오 특임장관이 유행시킨 '90도인사'처럼 고개를 90도로 숙여 깎듯이 인사를 하고, 좌중을 재미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행장이 90도로 인사한다고 부행장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경제 상식이 풍부해 들을 얘기가 있거나 힘이 세거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요. 그런 고객이 나를 만나고 싶게 하려면 재미있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은행 내부에서는 그를 ’무색무취한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4년 반을 수석부행장으로 있으면서 자기 색깔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수석부행장이 제목소리를 내면 조직이 시끄러워진다. 내가 챙기면 행장이 할 일이 없지 않느냐”며 “직원들이 저를 무색무취하게 봤다면 그때(수석부행장 때) 맞는 말이다. 잘 봤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했다.
부행장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행장 자리에 까지 올랐느냐는 질문에 그는 “저도 잘 모르겠다”고 웃은 뒤 나름의 생활 철학을 펼쳤다. “산을 오를 때 꼭대기를 보고 가면 오르지 못한다. 한 발짝 앞을 보고 묵묵히 걷다보면 정상에 도착한다. 참여정부 시절 대구경북 출신이 수석부행장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부행장 끝나고 집에 가더라도 후회 없다고 행장님께 얘기했다. 삼성은 혼신을 다 불사른 사람을 또 쓴다지만 그건 삼성이지 우리가 아니다.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는 은행장에 취임하면서‘우리나라 1등 은행, 아시아 리딩 뱅크’를 선언했다. 현재 추진 중인 우리금융의 민영화를 앞장서서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특혜 대출로 성장한) 제2 포스코, 삼성전자는 없다’며 대기업 계열사라 할지라도 특혜를 주지 않고 원칙대로 심사하겠다는 폭탄성(?) 발언도 했다.
이 행장이 정작 하고 싶은 일은 ‘기업과 서민이 가깝게 느끼는 우리은행’ 만들기다. “일제 자본으로 설립된 한성은행이 조선 상인들을 괴롭히자 고종황제께서 대한천일은행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은행이 됐어요. 태생이 그랬듯 기업들이 어려울 때 함께하는 우리은행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미소금융 사업을 확대해 제도권 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서민들도 많이 지원하고 싶습니다.”
대기업의 부실 계열사 꼬리 자르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여전했다. “대기업이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은 금융기관에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국민 고용을 줄입니다. 그러면 안 되지요.”
경주 이씨 판정공파 종손으로 7남매 맏이인 이 행장은 서울과 런던에서 주로 근무하고 대구경북에서 근무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행’이라고 했다. 고향 사람과 스킨십을 넓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일 게다.
이 행장은 그러면서 대구경북 밀착을 얘기했다. “대구은행이 고향에서 역할을 잘하고 있지만 글로벌화하려는 기업에게는 우리은행의 역할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큰 은행이어서 (금융지원) 시스템도 잘 되어 있어요. 고향 기업은 같은 조건이라면 더 지원할 생각입니다.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대구경북은 지금은 어렵지만 한다면 하는 기질을 갖고 있으니 분명히 발전할 것으로 봅니다.”
대구고는 선후배 사이는 동문관계를 확인하는 즉시 말을 놓을 정도로 끈끈한 정을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구사람들 사이에서는 해병전우회와 고대동문회, 호남향우회에 대구고동문회를 끼워넣어 ‘4대 불가사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행장도 대구고를 졸업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 행장은 우리은행이 가톨릭문학상을 만들어 15년째 지원하고 있고, 가톨릭 전산 시스템을 만들었다며 가톨릭과의 인연을 자랑했다.
대담 최재왕기자 jwchoi@msnet.co.kr 정리 박상전기자 miky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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